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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외출용 장난감

조카는 우리 집에 놀러 올 때 항상 나비 날개 모양 반짝이 배낭에 각종 장난감을 열심히 챙겨 온다. 자기가 만든 비즈 공예 캐릭터들, 스티커북, 보드게임, 아끼는 인형 등 구성품은 매번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막상 와서는 가방에서 제대로 꺼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 나는 오래간만에 멀리 외출할 일이 있었다. 왕복으로 지하철만 2시간을 꼬박 타야 하는 거리다. 이렇게 먼 길을 갈 땐 일만 보고 오면 왠지 허무해서 주변 구경도 하고 그 동네 카페에 가서 일도 하다가 온다. 그러면 용건이 있어서 왔다갔다한 게 아니라 짧은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아서 하루가 더 보람차다. 

그런 미니 여행이 있으면 평소보다 약간 비장하게 가방을 챙긴다. 먼저 노트북을 담는다. 사실 노트북을 안 챙겨야 더 여행스럽겠지만 그러기엔 마감이 너무 코앞이다. 3호선에서만 50분을 쭉 갈거라 지하철에서도 일을 좀 할 수 있고, 카페에서도 물론 할 수 있다. 하지만 혹시 자리가 없으면 노트북은 무용지물이니까 책도 한 권 챙긴다. 책은 지금 작업 중인 책으로 넣었다. 사실 몇 쪽 미리 읽는다고 생산성이 크게 높아지진 않지만 그래도 마감에 한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갑자기 생각을 적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공책과 필통을 넣는다. 필통에는 연필이랑 칼이랑 지우개랑 펜이 들어있다. 사실 생각만 적으려면 펜 하나만 간단하게 넣어도 되는데, 혹시 그림도 그릴지 모르는데 그림은 연필로 그리고 싶어서 결국 다 챙긴다. 중간에 음악을 듣고 싶을 수도 있으니 이어폰을 넣는다. 평소에는 이 정도로 끝나는데 오늘은 친구한테 편지를 쓸 거라서 카드까지 챙겼다. 

가볍게 나가려고 일부러 에코백을 들었는데 어느새 어깨가 묵직하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그렇다고 뭐 하나라도 뺐다간 그 머나먼 여정에서 너무나도 아쉬운 순간이 찾아올 것만 같다. 

드디어 출발하고,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친다. 하지만 일을 좀 하다 보니 졸리다. 마스크를 끼고 있으니까 뇌에 산소가 부족해서 그런가 자꾸 눈이 감긴다. 그러니 별 수 있나, 노트북 덮고 잔다. 그러다가 6호선으로 갈아탔는데 얼마 안 가서 내린다는 생각에, 그리고 오늘의 용무에(두구두구!) 좀 설레는 상태였던지라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일이 끝나고는 카페에 가서는 친구한테 편지를 술술 쓰고 오늘 일에 대해 생각을 좀 정리하고 일도 좀 해서 가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알차게 쓰고 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쓰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다 쓰고 고개를 들어보니 곧 해가 지기 시작할 텐데 슈퍼문이 뜨는 날이라고 한다. 달은 내 친군데! 내가 마중 가야 하는데! 결국 서둘러 짐을 챙겨 집으로 향한다. 지하철에서는 역시 노트북을 펼쳐 조금 일을 하다가 마스크를 탓하며 잠이 들고 만다. 

집에 와서 무거운 에코백을 내려놓고, 필요도 없었던 여러 물건을 꺼내려니까 열심히 가방을 챙겼던 몇 시간 전의 내가 생각나서 웃겼다. 빵빵한 우리 조카 배낭을 보고 웃었었는데, 나도 가지고 놀지도 않을 어른용 장난감들을 챙겨 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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