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툭한 연필을 단정하게 깎아놓는 게 좋다. 당장 쓸 일이 없어도. 사실 연필심이 뭉툭해도 글씨를 쓰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하지만 뾰족하게 다듬은 연필 심을 종이에 처음 대는 설렘을 미래에 언제든 바로바로 느낄 수 있도록. 인생도 그리 살아야지.
또 큰 눈이 내렸다. 첫 번째 눈은 마구마구 놀고 싶은 눈이었는데 이번 눈은 고이 두고 감상하고 싶은 느낌이다. 뭔가 더 포슬포슬하고 예쁜 것 같다고 할까. 눈 성분이 갑자기 바뀐 것도 아닐텐데 왜 그럴까 모르겠다. 벚꽃나무들에는 눈이 내려앉아서 흰 꽃이 피었다. 늘 잠겨있는 철문도 무슨 일인지 열려있어서 신비롭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일까 과연!! 내일은 작업실 출근 전에 양재천도 가봐야지. 너무너무 아름다울 것 같다. 최대한 일찍 일어나서 갈게 날 안 추워도 녹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줘
작업실 수도가 얼었다. 어제는 신나기만 했다. 비록 난방을 열심히 틀어도 실내에서 얼음이 얼지만 창문만 열면 옆 건물 지붕이 내 전용 눈밭으로 변신해있는 작업실이 사랑스러웠다. 눈사람 하나 만들어서 사람들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창가에 세워두고 행복하게 퇴근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게 뭔가. 물이 안 나온다. 이게 말로만 듣던 수도 동파구나. 이래서 추운 날엔 물을 조금씩 틀어놔야 한다는 거였지. 알긴 했는데 얼마나 추울 때 그래야 하는 건지를 몰랐다. 그래도 그렇지 어제 새벽 6시까지 물 쓰고 12시간도 안돼서 다시 갔는데 그렇게도 춥고 외로웠어? 급하게 전기 히터를 하나 사서 세면대에 틀어놓고, 싱크대에는 전기레인지를 틀어놨는데 사실 그런 걸 놓을 위치가 안되지만 엄마가 냄비와 도마를 절묘하게 쌓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