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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금단의 공간

우리 아파트 상가 독서실은 이 동네에서 근 20년째 내게 금지된 공간이었다. 

나는 고3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능 공부를 하겠다고 집 앞 독서실에 등록한 지 이틀 만에 주인아주머니와 모종의 갈등이 생겼고, 아주머니는 다음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의 만행을 알렸다. 그리고는 자신은 괜찮지만 총무를 보는 대학생이 이렇게 싸가지없는 아이는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며, 자신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나를 독서실에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단다. 나는 엄마가 통화하는 소리를 방에서 있는 힘껏 훔쳐 들으며 떨고 있었다. 다행히도 엄마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다니고 싶으면 사과를 하든지 아니면 엄마가 대신 짐을 챙겨 오겠다고 했다. 사실 나도 화가 날 만한 이유가 있었고, 독서실에 간다고 딱히 공부가 잘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고민 없이 그만 다니기로 했다. 

그때부터 그 독서실은, 행여나 앞을 지나가더라도 구태여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는 그런 곳이 되었다. 앙금을 가지기에는 너무 오래된 얘기지만 그 독서실을 쳐다보지 않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렸다. 

그런데 얼마 전 새 스터디 카페가 생겼다는 전단지가 날아왔다. 여름에 시원하게 일할 공간이 필요하던 차에 집에서 1분 거리라니, 고민할 필요도 없이 여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착해보고서야 알았다. 그 독서실을 새로 단장한 게 바로 이 스터디 카페였다는 걸. 

처음에는 짜릿했다. 날 영원히 쫓아낼 수 있을 줄 알았냐고. 내가 이렇게 돌아왔고, 이제 나도 어른인데 엄마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할 거냐고. 조금 더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 결론적으로 내가 돌아와서 한 게 뭔데. 원수의 매출 올려준 것밖에 더 있냐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어릴 땐 나만 다 잘못한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서 돌이켜보니 나에게는 말 한마디 없이 부모님께 전화를 걸고, 말도 안되게 '총무'를 내세워 사과를 받아내려 했던 그 아주머니의 행동도 결코 성숙하지 않았던 거다. 일개 대학생 아르바이트인 총무가 무슨 권리로 사장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객을 내보낸다 만다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성의 없는 거짓말이었다. 

예전 독서실과는 비교도 안되게 세련돼진 '스터디 카페' 책상에 앉아있을 땐 몰랐는데, 같이 단장하지 않아서 낡아빠진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고 있으려니 어렸던 고3의 나,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동시에 비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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