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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포스트 아파트

나에게 아파트는 집의 다른 말이다. 굳이 따져보면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4~5년 정도 빌라에 살아보기도 했지만 내 기억 속에서 비중이 크지 않다. 그래서 책자 속 배우들 인터뷰에 나와있는, '아파트'에 대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에 대한 질문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흡사 삶에 대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뭐냐는 질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파트는 '아빠'를 뜻하기도 한다. 이건 제작진의 의도는 전혀 아니었지만 오늘 공연 중 나오는 영상을 보고 깨달은 거다. 왜냐하면 우리 아빠가 아파트 만드는 일을 오래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인 이유로 아파트는 아빠를, 이마를 부딪히면 말도 못 하게 아픈 제도판 모서리를,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과 명절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실 나도 아파트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지라 아파트를 주제로 책을 구상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건 며엋년 전이고, 이미 손을 놓은지도 몇 년이 지났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삭막하지만은 않은 아파트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풍경도 남겨놓으면 재건축으로 지금의 아파트가 사라진 다음에도 멋진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소재들만 조금 모으다 말았다. 그 사이 비슷한 주제로 '안녕 둔촌 주공 아파트'라는 아주 멋진 책이 나왔고, 둔촌 주공 아파트는 재건축이 한창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 내 책은 몇 년 동안 지지부진하다 시작도 없이 끝났고, 처음 계획대로라면 완공된 지 15년은 됐어야 하는 우리 아파트 재건축도 대략 그렇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해봤어야 했나 미련이 남는다기보다는 역시 그 아파트에 그 주민인 것 같아 웃기다. 

미래의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결혼을 하게 될 것인가, 말 것인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과연 몇 살에 독립을 할 것인가. 혼자 살게 된다면 내 능력으로 어느 동네 어떤 집을 보금자리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마음에 쏙 드는 동네에 있는 작고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싶다. 허름한 아파트인건 안분지족의 삶을 살고 싶어서는 아니고 현실적으로 '좋은 동네'와 '좋은 집'을 다 충족할 순 없을 것 같아서. 단독주택에서의 삶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뼛속까지 아파트키드인 나이기에, 집 벽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혼자 온전히 소유한다는 건 외딴섬에 혼자 떨어져 사는 느낌일 것 같다. 

공연이 끝난 다음에 관객이 공연장 벽과 바닥에 자유롭게 메시지를 남기는 순서가 있었다. 입장 전부터 이 안내를 받고, 공연 내내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을 보면서 나는 무슨 말을 쓰고 갈까 고민했더랬다. 그런데 막상 공연이 끝나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펜 분배가 끝나 있었다.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지막 장면이 나올 땐 맨 안쪽 구석에 있었는데, 펜을 출입구 쪽에서만 나눠줬나 보다. 수량이 부족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쓸 때까지 기다리라는 스탭의 말에 실망해서 구경만 하다가 나왔는데, 하루 지나고 생각하니까 뭐랄까 청약에 떨어지고 내 집 마련에 실패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 같아 재미있었다. 사실 공연 중에는 대한민국의 그 많은 아파트들 중 바로 우리 아파트가 슬며시 언급돼있어 반가웠었다. 그래서 끼워 맞추자면, 관객도 공연의 일부가 되는 이 작품에서 나는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 역할을 다 맡아본 거다. 

<포스트 아파트>를 보고 온 오늘은 오랜만에 아파트에 대해 이래저래 많이 생각했지만, 아무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심오한 생각해도 결론은 나도 한 채 갖고 싶다. 사는 것 아니고 사는 곳 할 테니까, 내 명의로 사는 곳 딱 한 채만 주세요... 

추가. 몇 년 전에 아파트를 주제로 만든 노래가 있었는데 제작은 안 했지만 가사만이라도 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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