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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운전면허증 발급의 추억

운전면허증을 새로 발급 받았다. 면허를 딴지는 14년이 됐지만 시험 볼 때 트럭을 몰고 일반적인 자동차라면 운전석에 앉아본 적도 없었는데, 이제 진짜 운전을 하기 위해 목욕재계하는 마음으로 증명사진부터 다시 찍었다. 벌써 세 번째다. 


1) 첫 운전면허증 발급 - 삥뜯기

스무 살 여름방학 때 언니를 따라 운전학원에 등록하고 면허를 땄다. 아직 고등학생 티를 못 벗은 나는 외출할 때 제대로 된 지갑을 챙기기보다 교통카드가 달린 휴대폰 아니면 몇 천원 정도만 주머니에 찔러넣고 다닐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제 나이도 있으니 항상 돈을 챙겨 다니라는 엄마의 꾸중을 한창 듣던 시기였다. 면허증을 발급 받는 날도 집에서 멀지 않은 시험장까지, 가벼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맙소사, 면허증 신청에 돈이 필요했다. 사실 면허증 자체는 필요 없었지만 빈 손으로 돌아가면 엄마한테 거봐라며 혼날 게 뻔했다. ATM에서 돈을 뽑지도 못했다. 어떻게든 따끈따끈한 면허증을 받아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시험장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길 가던 아저씨를 붙잡고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집에 가야 하는데 교통비가 없다는 등의 핑계도 안 대고, 면허증을 발급 받으러 왔는데 돈이 모자라다고 했다. 돈 갚겠다고 계좌번호를 받아온 것도 아니면서 '빌려'달라니 뻔뻔도 하다. 

놀랍게도 아저씨는 오천원을 주셨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내가 정말 간절해 보였던건지, 아저씨가 워낙 너그러운 분이셨던건지, 아무튼 나는 허무할 만큼 간단하게 생애 첫 (그리고 설마 마지막) 삥뜯기에 성공했다. 그렇게 모르는 아저씨께 받은 돈으로 첫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았다. 아직도 그 근처를 지나칠 때면 그 때의 내가 생각나서 어이가 없다. 

 

2) 면허 갱신 - 모르는 사람

첫 면허증에 썼던 증명 사진은 내 인생사진 중 하나로 꼽힌다. 맨얼굴에 머리는 질끈 묶고 지하철에 있는 사진 기계에서 찍었는데, 옆에 있던 남자친구가 일부러 웃긴 얘기를 해줘서 실제로 웃는 순간이 찍혔다. 사진이 어찌나 상큼한지, 신분증이 필요때마다 주민증록증 대신 운전면허증을 내밀었고 칭찬도 많이 들었다. 

20대 후반이 됐을 쯤 면허증을 갱신하기 위해 새로 증명사진을 찍었다. 순진하게도 나는 지하철 사진 기계가 또 한번 인생사진을 안겨줄 줄 알고, 혼자 아무 기계에나 들어가서 똑같이 맨얼굴에 머리를 묶고 웃어보았다. 옆에서 웃겨주는 남자친구가 없어서 그런가? 겨우 20대 후반에 나이 탓인가? 아니면 지하철 기계에도 초심자의 행운 같은게 있었던 걸까? 사진 기계는 내게 굴욕을 줬다. 하는 수 없이 곱게 화장을 하고 강남역에 있는 유명하다는 사진관에 갔다. 

사진사의 지도 아래 촬영을 마치고 보정까지 마친 사진을 보여주는데, 컴퓨터 모니터에 처음 보는 예쁜 여자가 나랑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리퀴파이를 이정도로 떡칠할 줄이야. 완벽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게 좋으니 차라리 원본을 그대로 뽑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눈에 익숙해진 보정된 사진이 원본으로 돌아가는 순간 내 얼굴이 무너지고 하늘도 무너졌다. 리퀴파이로 빚은 얼굴이 아무리 가증스러워도, 그 순간에는 차마 원본을 인화할 수 없었다. 그 예쁜 여자의 사진을 들고 면허증을 갱신하러 갔던 날엔 사진과 최대한 비슷해 보이고 싶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껏 치장을 하고 갔더랬다. 

그 후로 더이상 신분증을 보여줄 때 운전면허증을 꺼내지 않았다. 그 면허증은 4년 전쯤 지갑을 잃어버리면서 같이 사라졌는데 1종이라는 운전 실력이나 사진이나 다 거짓이라는 생각에 재발급을 받기 싫었다. 


3) 면허증 재발급 - 이번엔 진짜 

이번에는 진짜로 운전을 하기 위해 면허증을 재발급하기로 했다. 면허증을 분실했을 땐 사진을 새로 가져갈 필요가 없지만 새 마음 새 출발을 위해 새로 찍었다. 이번에는 14년 전처럼 활짝 웃는 대신 미소만 지었다. 보정된 완성본은 언제나 그렇듯 혼신의 클릭질로 완성됐음에도 상태가 아주 좋은 내 모습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첫 번째 증명사진은 스무살의 풋풋했던 나, 두 번째 사진은 아직 어설프지만 그럴듯해지려 노력하던 나, 세 번째 사진은 각고의 노력 끝에 제법 성숙해진 나를 대변하는 걸까? 

새로 찍은 사진을 가지고 갔더니 사진을 바꾸고 싶으면 이유를 적으란다. 뭔가 피치못할 사정을 대거나 세련된 문장이라도 구사하고 싶었지만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기존 사진은 포토샵이 너무 심해서'라는 마치 증명사진 원본처럼 가감없는 사유를 적어 내고 4년 만에 새 면허증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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