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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프리랜서의 여행

지금 나는 마닐라에 있는 한 호텔에서 이 글을 쓴다. 출장도 아니고 순수하게 놀러 왔건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또 한 번 노트북을 짊어지고 휴가길에 오른 것이다. 


요즘은 자꾸 거절을 하다 보니 잦아들었지만, 나는 이 친구 저 친구에게서 같이 여행 가자는 제안을 일 년에 몇 번씩 받는 인기인이었다. 내가 연륜이 많아서 나랑 다니면 낯선 도시에서도 마음이 든든하다거나 타고난 모험심으로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소위 말하는 '돈 있는 백수'다. 물론 사실은 내가 피땀 흘려 버는 돈이니까 '백수'는 아니지만 일 년에 며칠이라고 못 박혀 있는 휴가를 윗사람 눈치 봐가면서 써야 하는 직장인이 아니라 내가 쉬고 싶으면 언제든 마음대로 쉴 수 있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는 두 친구가 각자 회사에서 눈치를 봐가며 휴가를 맞추는  것보다는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날짜를 맞춰줄 수 있으면 같이 떠나기가 훨씬 수월하니까, 나는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으리라는 환상으로 다들 나에게 여행을 가자고 했던 것 같다(물론 나랑 다니는 게 너무 즐거워서 일 수도 있고!). 


제법 맞는 말이다. 실제로 직장인 친구들보다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달력에서 공휴일을 확인해가며 황금연휴를 찾는 대신 여유로운 비수기에 일정을 넉넉히 잡고 떠난다. 최근에는 연휴 기간에 친구들과 날짜를 맞춰서 같이 휴가를 떠났다가 친구는 먼저 돌려보내고 나머지 기간은 나 혼자 여행을 하는 즐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러나 이 자유로운 영혼의 어깨를 묵직하게 눌러주는 게 하나 있다. 노트북이다. 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할 때면 두 손이 바빠진다. 배낭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꺼내 바구니에 담는다. 옆에 서 있는 친구가 손가방에서 우아하게 휴대폰 하나 정도만 꺼내놓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짐을 찾고 나온 친구는 곧장 현지 유심을 사서 휴대폰에 끼워 넣는다. 한국에서의 전화번호가 먹통이 되는 대신 낯선 나라에서 짜잔 인터넷이 연결된다. 내게 인터넷보다 중요한 건 로밍이다. 누군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로밍인지 여부를 알려주는 기능도 절대 쓰지 않는다. 일에 관련된 전화가 오면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때고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건 어느 때고 일에 묶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는데 "전 지금 여행 중이라서요, 2주 후에 해드릴게요."라고 말하는 내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떠나 있는 동안에는 언제든 평소와  다름없이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다. 공항에서도 대기 중에도 일하고, 기차에서도 일하고, 친구 혼자 쇼핑 보내 놓고 호텔에 혼자 남아서도 일하고, 모두가 잠든 고요한 도미토리 숙소의 불 꺼진 카페테리아에서도 일했다. 아예 숙소 근처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일만 하는 날도 간혹 있는데, 그럴 때면 여행지에서의 볼거리를 놓치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 지역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며 살아가는 현지인' 기분을 내보는 것 같아  하루쯤은 괜찮은 경험이다.


노트북 등껍질은 무겁기는 해도 여행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해주는 존재이기에 그 무게를 견딜 만하다.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기에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으니까. 그게 싫다면 가벼운 몸으로 훌쩍 떠났다가도 일을 놓칠세라 득달같이 돌아와야 하겠지. 사실 모순이니 지속가능성이니 거창한 단어를 쓸 필요도 없이 6년 동안 열심히 써온, 구입 당시에도 아주 가벼운 기종은 아니었던 노트북이나 날렵한 걸로 바꾸면 마음의 등껍질까지 한결 가벼워질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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