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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그놈의 기획서

내 이름 석자가 '옮긴이'로 박힌 책을 서점에서 처음 마주했던 것은 번역을 시작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물론 '지은이'와는 차원이 다르겠지만 나는 일단 번역을 하고 있으니). 여러 종류의 번역 중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 대비 들어오는 돈은 가장 적지만 가장 배우는 것도 많고 끝내고 나면 뿌듯하고 남들 보기에 폼까지 나는 건 역시 출판 번역인 것 같다.

 

프리랜서로서 출판 번역을 시작하는 기본은 출판사에 기획서를 보내는 것이다. 해외에서 출간된 책 중 우리나라에 소개하면 좋을 것 같은 책을 골라서 관심을 가질 만한 국내 출판사에 제안하는 것이다. 기획서를 받은 출판사에서 그 책을 내기로 결정하면 내게 번역을 맡긴다. 그렇게 한 출판사와 서로 잘 맞으면 그 책 이후로 다른 책들을 함께 할 수도 있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인맥을 활용하는 건 가장 확실할 수 있지만 아는 사람이라고 뭔가를 부탁하는 건 썩 내키지 않고, 에이전시에서 일을 받은 적도 있지만 금전적으로나 작업 과정과 결과에서나 즐거운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기획서를 보내는 것은 인맥이나 에이전시에 비교할 수 없는 번역가로서 새 일을 시작하는 가장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방법이다. 때로 일이 고단하거나 지겹더라도 언제든 기획서를 써서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아 떠날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직업 생활'을 위한 든든한 보험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나는 가끔 하기 싫은 일이 있을 때면 '그래도 이 일이 있으니까 기획서 안 써도 되는 게 어디야'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사실 기획서를 쓰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다. 


기획을 하는 과정은 이렇다. 먼저 아마존과 미국 영국의 도서 관련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여러 책을 살핀다. 그 중 좋아보이는 책을 골라서 미리보기 페이지와 후기를 샅샅이 읽어본 다음 어느 정도 확신이 들면 책을 사서 실제로 읽어본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획서를 쓸 차례다. 줄거리를 정리하고 견본 페이지를 번역하고 내 의견도 적는다. 그리고 이 책이 잘 맞을 출판사를 물색해서 연락처를 찾고 기획서를 보낸다. 그 다음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그런데 이 과정 사이사이에는 수많은 내적 갈등이 개입된다. 우선 출판사에 의미 있는 제안을 하려면 그 책의 판권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개인 자격으로는 그걸 확인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미 어떤 출판사에서 판권을 사서 나 아닌 누군가와 계약을 마쳤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래서 한 번은 내가 출판사에 기획서를 보내고 바로 며칠 뒤 그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적도 있고, 너무 번역하고 싶었던 책을 제안했는데 마침 그 출판사에서 며칠 전 그 책의 판권을 사서 다른 번역가와 계약을 했다는 슬픈 답변을 들은 적도 있다. 물건을 팔긴 하는데 재고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못하고 무작정 영업을 해야 하는 것 같은, 가히 근원적인 불확실성이다.


이런 불확실성을 덮어두고 마침내 책을 선택했으면 책을 구매해야 한다. 간혹 후기가 정말 좋고 미리보기도 넉넉하면 그 페이지만 읽고 적당히 기획서를 써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양심이 손목을 붙잡고 결제를 시킨다. 하지만 외서는 국내서보다 비싸고 배송도 오래 걸려서, 돈과 시간을 들여 받은 책이 기대 이하일 때에는 허무함을 금할 길이 없다.


이 과정을 모두 극복하고 기획서를 썼으면 출판사에 보내야 한다. 가장 불확실성이 큰 단계다. 텅 빈 산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것처럼 속절 없는 기분이다. 답장이 오기라도 하면 감사하지만 답장은 대개 거절을 의미한다. 경험 상 좋은 소식은 이메일 답장이 아닌 전화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출판사가 원망스럽진 않다. 그들 입장에서야 고만고만한 기획서가 하루에도 몇 통씩 들어올테고 다른 업무도 충분히 많을 테니, 그게 억울하면 내가 1인 출판사를 세우는 게 나을 거다. 이해한다고는 해도 계속 퇴짜를 맞다보면 자신감도 떨어지고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도 생긴다. 경력이 생기면 좀 수월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시간이 흘러보니 그렇지도 않다. 좀 더 경력이 생기고 실력도 쌓이면 그땐 정말 괜찮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서를 쓴다. 적당히 즐거운 일은 가만히 있어도 굴러들어올 때가 있지만 진짜 하고 싶은 일은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기획한 책을 번역하게 되면 불확실함 속에 느꼈던 스트레스도 모두 상쇄될 테니까. 사실 나는 지금껏 설명한 이상적인 과정을 통해 내가 기획한 책을 번역한 적은 없다. 지금껏 번역한 책은 다른 방식으로 제안을 받았던거고, 내가 기획한 책들은 각종 헛발질로 다른 출판사와 번역가의 손에 넘어갔다. 어찌됐건 나는 또 기획서를 쓸 거다. 진정으로 실력을 인정 받아서 가만히 있어도 흥미로운 책들이 절로 들어와 골라가며 번역을 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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