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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임금협상: 나 얼마큼 사랑해?

연애가 건강하게 지속되려면 시간이 흐를 수록 관계가 전진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과 생활 속 지분을 점점 많이 내줘야 하는 것이다. 그 지분이 확장을 멈추고 정체하거나 축소되기 시작하면 연애는 파국을 맞이하기 쉽다. 사회생활은 연애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그 중에서 돈은 갑이 을에게 보여주는 가장 명징한 사랑의 표현이기에, 이 사랑의 무게를 협의하는 건 두 사람의 관계가 시험대에 오르는 아찔한 순간이다.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걸까?"

며칠 전 한 클라이언트로부터 사랑을 추가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나의 첫 거래처이자 6년째 같이 일하고 있는 회사로, 번역료를 올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껏 받던 금액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내가 제안한 액수였는데 그 후로 새 거래처가 생길 때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해서 전체 수입을 올리긴 했지만 첫 클라이언트와의 관계에 진전을 꾀하진 않았다. 사귄지도 꽤 오래 되었거늘 결혼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늘 자상하고 날 아껴주는 남자친구를 만나며 마음 한 구석이 아쉽긴 해도 지금이 행복하니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는 느낌이었을까?

"나랑 얘기 좀 해."

칼을 빼들었다. 결정적 계기는 이 회사에서 다른 번역 회사가 받는 요금을 우연찮게 본 것이었다. 이 거래처는 외국계 회사고, 내가 본 요금은 우리보다 물가 높은 다른 나라 지사가 그 나라에서 지불하는 비용인데다 난 개인이고 그쪽은 회사라서 정확한 비교 대상은 아니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미 피해의식이 뭉게뭉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같이 인턴을 하며 정규직이 못 될까 불안해하던 친구들은 어엿한 대리가 되었는데 나는 그깟 돈 한 푼 올려받지 못한단 말인가. 밖에선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는데 이런 대접 받을 처지가 아닌데 등등등.

"우리 무슨 관계야?"

떨리는 마음으로 인사팀 이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간단히 안부를 묻는 '근황토크'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갔다. 내가 이 회사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그 동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밖에선 얼마나 성장했는지 마음으로 호소했다. 얼마를 어떻게 올리고 싶은지 정리해서 이메일을 보내달라는 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그 날 밤, 난 다시 최대한 담담하고 논리정연하게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이메일을 썼다. 퇴짜 받을 걱정 반, 올라간 번역료로 견적서를 작성할 설렘 반으로 마음이 두근거렸다. 답장은 없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주도. 일은 계속 들어오는데 의욕이 나지 않았다. 3주 정도 지나 이사님께 다시 전화를 드렸다. 사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아직 결제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사님을 믿고 기다리기로 한다.

"시간이 필요해."

처음 임금 인상 제안을 한지 한 달 정도가 지난 며칠 전, 이사님께 전화가 왔다. 왜 이제야 전화하는 거냐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냐고 원망하는 마음은 눈처럼 녹아내리고 없었다. 그저 모든 게 반가울 따름이었다. 이사님의 답변은 절충안이었다. 내년도 예산이 정해져 있어서 갑자기 비용을 확 올리긴 어려우니 제안의 50%만 올리자는 거였다. 다음에 다시 얘기를 해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열어두었다. 나도 흔쾌히 동의했다. 늘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덕담에 나도 더 열심히 하겠다고 화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언제나처럼 자상하고 날 아껴주는 연인이 분홍빛 가득한 미래를 약속해주진 않아도 날 서운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은 것이다. 

목표를 100% 달성하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꽤 훈훈한 임금 협상 과정이었던 듯 싶다. 사실 요구사항을 던져놓고 '내가 하자는대로 못 할거면 헤어져' 식의 초강수를 뒀다가 튕겨나간 적도 있고 쾌재를 부른 적도 있다(생각해보니 실제 연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초강수는 결과가 어떻든 어느 한 쪽은 상처를 받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연애에서 더 사랑하는 쪽이 마음을 졸이듯 임금 협상에서도 아쉬운 쪽이 약자가 되고 프리랜서는 그렇게 사랑을 갈구하는 입장이기 쉽다. 슈퍼을이 되어 상대를 휘두르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거래처라는 연인에게 최선의 사랑을 주면 섭섭치 않은 마음을 돌려 받으며 오래 오래 함께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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