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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이거 하나만 해줘

"나 이것 좀 번역해주면 안 될까?"


주변 지인들에게서 가끔씩 듣는 부탁이다. 지금은 번역을 주로 하지만 디자인도 전공이다 보니 디자인에 대해 비슷한 부탁을 받기도 한다. 가끔은 비용을 어느 정도 치르면 될지 물어보기도 하지만 실제 일을 하면서 받는 금액에 지인 할인을 곁들인 액수를 대더라도 회사가 아닌 개인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은 바빠서 힘들 것 같다고 거절의 뜻을 밝히면 서운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호소한다.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냥 해줘도 되잖아.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


번역이라는 일이 만만한 건지 내 인상이 만만한 건지, 친구들은 물론 동갑이라 좀 편하게 지냈던 보험설계사에게까지 이런 부탁을 들은 적이 있다. 회사에 다니면서 여러 사람 부대껴가며 일하는 게 아니라 거절하기 곤란한 일은 많이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마음이 편한 건 아니다. 가끔 돈 받고도 하기 싫은 난해하고 양도 많은 일을 들이밀 때에는 말할 것도 없이 싫지만, 솔직히 말해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일 때도 있다. 하릴없이 인터넷 쇼핑몰 들락거릴 시간 조금만 할애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더라도 해주기 싫은 건 내 시간과 노력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어서인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과연 얼마나 떳떳할까?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나한테 위와 같은 부탁을 했던 친구가 다른 사람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불평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너는 이 글을 보게 되지 않기를). "너도 나한테 그런 적 있잖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억누르고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딱히 모순적인 게 아니라 '무지'라는 명목 아래 누구나 무심코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아닐까 싶다. 내 스스로를 돌이켜보자면 일은 워낙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하니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일이 없지만, 업무나 친구 관계를 넘어서 일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내가 주는 것 이상의 무언갈 바라는 것'으로 범위를 넓히면 걸리는 일이 분명 나올 것이다. 예를 들면 커피숍에서 비싸지도 않은 아메리카노나 라테 한 잔 시켜놓고 혼자 몇 시간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일을 하면서 '어차피 빈 테이블도 있는데 주문 안 하고 버텨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그 예가 될 수 있을까? 대인관계도 좁고 생활 반경도 좁으니 생각나는 게 없지만 어딘가에서 분명 나도 모르게 민폐를 끼치고 있을 거다. 


내가 제일 말하고 싶은 건 그거다.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사실은 타인에게 큰 희생을 동반하는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을 수 있다고. 나 역시 그 무지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지만 가해자가 될 때는 그 사실을 잘 인지할 수도 없고, 그래서 피해자를 더 괴롭게 만들기 마련이다.  그런 부탁을 당했을 때에는 물렁거리지 말고 확실하게 거절을 해주는 게 서로를 위해 더 좋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내 시간과 노력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시간과 노력도 소중하다는 게 쉬우면서도 아쉬울 땐 잊어버리기 쉬운 명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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