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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달리기 - 우리 중에 간첩이 있어

별다른 외출도 없이 졸리면 자고, 잠 깨면 일하기만 반복해서 생활 패턴이 완전히 뒤집힌 요즘(마침 우리랑 시차가 12시간 나는 아르헨티나 거주 PM이랑 일하는데 너무 좋아한다). 오늘은 이쯤 하자, 하고 일을 접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데 해 뜨는 시간은 점점 빨라졌다. 그러면서 어느새 자려고 불을 꺼도 방이 어두워지지 않는 게 익숙해졌다. 불을 켜고 끄는 탁 소리가 나면 주변이 극적으로 환해지거나, 극적으로 어두워지기를 습관적으로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탁 소리가 나고도 밝았던 방이 캄캄해지지 않는다. 스위치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요즘은 달리기 할 때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자신은 없어서, 코로나 이후로는 사람이 적은 아주 늦은 밤에만 달리기를 하러 나가던 게 더 늦어져서 새벽 달리기가 되고 말았다. 사실 이미 버린 생활 패턴이기는 해도 컴퓨터를 끄고 나면 1초라도 빨리 자고 싶지 취침 시간을 한 시간씩 늦추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창문 열어보면 새벽 공기가 너무 상쾌하다. 아주 가끔씩 오전에 일이 생겨서 아침에 밖에 나갈 때마다 그 공기와 활기를 느끼면, 내가 방종한 생활로 이 세상의 큰 아름다움 하나를 놓치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새벽 달리기는 실제로는 방종함의 극을 달리면서 아침보다 더 힘든 새벽의 상쾌함을 만끽할 수 있는 치트키다. 

새벽 시간에는 다른 시간대에는 없는 특별한 기운이 있는 게 분명하다. 몇 시간을 내리 일하면서 밤을 꼴딱 새우고 나서도,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새벽 길을 나서면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새 하루를 시작하는 한 마리의 종달새가 된 기분이다. 주변 만물이 생동하는 기운을 받아서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일찍 나가도 나보다 먼저 나와서 하루를 시작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마음에 힘이 된다. 버스 기사도 있고, 나처럼 운동을 나온 사람도 있고, 벌써부터 어딘가에 가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한적한 밤거리에서 누군가를 마주칠 땐 느낄 수 없는 동지애 같은 게 새벽 시간에는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 보면, 나도 저 사람들 눈에는 이렇게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러 나온 부지런한 사람으로 보이겠지 생각한다. 그러면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아서 기분 좋다(현실은 정 반대라도). 아침형 인간들 사이에 껴서 가짜 아침형 인간 행세를 하는 기분이라 내 자신이 웃기다.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뿌듯함.

달리기를 할 때 늘 음악을 들어왔는데 오늘은 중간에 껐다. 새벽의 고요함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리' 같아서, 물론 음악도 좋지만 이런 고요 속에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더 희소하고 호사스러운 경험 같아서 놓치기 아까웠다. 끊이지 않는 물 소리랑 가끔씩 들리는 까치 소리, 바람 소리, 아주 가끔 마주치는 새벽 동지들의 자전거 바퀴 소리 등이 전부다. 음악은 진통제처럼 달리기의 고통을 달래주는 대신 재생되는 동안 내 뇌를 반 정도는 차지하고 있는 느낌인데, 음악을 끄니 내가 그 자리에 더 온전하게 존재하는 기분이 든다. 소리 없이 보내는 시간을 늘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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