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 ⑤ - 피렌체

친퀘테레에서부터 기차로 피사를 거쳐 피렌체역에 도착했다. 


어두워져가는 하늘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나는 어디 가든 날씨 운이 좋은 편이었고 불쾌한 일도 거의 겪어본 적 없었는데, 이번에는 날씨 운이 좋지 않아 전반적인 운도 덩달아 나빠졌던 걸까? 숙소로 향하는 길부터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마찰이 생겼다. 그는 여러가지로 상황이 꼬여서 체크인 시간이 40분 늦어진 것에 대해 추가요금 30유로를 요구했다. 지치고 짜증난 내가 어깨에 메고 있던 노트북 배낭을 침대에 내팽개쳤더니 "예의를 갖추라"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내가 너한테 뭘 어쨌다고 나더러 예의를 갖추라고 하냐, 니가 오는 법 제대로 안 가르쳐주는 바람에 고생해서 오느라 비도 맞고 어깨가 무거워서 가방도 못 내려놓냐, 그냥 30유로 받고 가라"고 받아치면서 돈을 꺼냈다. 원래 화나면 영어 실력이 떨어지는데 이 날은 이상하게 말이 술술 나와 다행이었다. 


그 전 날 기차표를 새로 산데 이어 이틀 연속으로 쌩돈을 날리고나니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든 이 호스트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소위 '한국인만 알 수 있는' 식으로 안 좋은 후기를 남기고도 싶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나와의 갈등말고는 딱히 단점이 없었다. 그냥 합리적인 가격의 깔끔한 숙소였다. 한국인들이 남긴 후기도 칭찬 일색이었다. 뭔가 억울했다(나쁜 후기는 남기지 않았지만, 알고보니 추가요금을 현금으로 바로 요구하는 건 에어비앤비 규정 위반이라서 나중에 항의하고 30달러짜리 쿠폰을 받았다). 


어쨌거나 내가 호스트에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했다는 게 신기했다. 스물 한 살에 호주로 혼자 해외여행을 처음 갔을 때,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끌어내 혼자 바에 들어가 칵테일을 시켰더랬다. 술에 대해서도 아는게 없어서 알록달록 예쁜 메뉴를 골랐는데 한 모금 꺼리밖에 안되는 유리잔에 나와서 당황했었다(메뉴판에 샷이라고 써있었겠지만 그땐 그런걸 몰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잔을 받아들고 최대한 아껴가며 그 칵테일을 홀짝이는데, 분명 술이 조금 남은 잔을 바텐더가 말도 없이 치워버리는 거다. 왜 자신감이 없을 수록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에도 쉽게 상처받고 발끈하지 않나? 바텐더가 날 무시하고 나가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생각에 억울해진 나는 "그거 조금 남아있었는데..."라고 소심하게 항변했다. 바텐더는 아무렇지 않게 "그래? 그럼 다시 줄까?"라고 대꾸했고, 나는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할 말이 없어 "아니..."라고 기어가는 소리를 뱉으며 허무하게 나와 밤거리를 서성였었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자라서 모르는 외국인이랑 말싸움까지 하다니, 좋은건지 나쁜건지 몰라도 나 많이 컸다. 그래도 혼자 안전하게 다니려면 감정 조절을 더 잘하든, 맞짱 떠도 버틸 수 있게 주짓수를 배우든 하나는 해야겠다. 


다음날 아침, 호스트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는 작은 선물의 의미로 피렌체에서 제일 맛있는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가려고 하는데 초코랑 마말레이드 중에 무슨 맛을 원하냐고 물었다. 나는 빵 따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받아버리면 나중에 복수하기 멋쩍을 수도 있고, 원래 빵을 즐겨 먹지 않아서 맛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거 필요 없다는 말을 최대한 냉정하고 단호하면서 옹졸해보이지 않게 하고 싶어 고민하는 사이, 그는 두 가지 맛을 다 사서 부엌에 두고 떠났다. 나는 숨 죽이고 자는 척을 하다가, 그가 현관 나서는 소리를 듣고서야 방 밖으로 나와 식탁에 놓인 초록 봉투를 확인했다. 초코와 마말레이드 맛이 다 있었다. 여전히 호스트가 미웠지만 나는 감정과 음식을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이므로 접시에 빵을 올리고 커피를 내려 내 방에 딸린 테라스로 나갔다. 


웬걸, 빵은 정말 맛있었다. 원래 빵을 썩 좋아하지 않고 단 맛도 즐기지 않는데 이렇게 달콤하고 맛있을 수가. 과연 이탈리아는 미식의 나라인가? 더군다나 지금껏 이탈리아 숙소에서 먹은 조식은 전부 비스킷이었다. 푸석푸석한 비스킷. 그 근사했던 밀라노 에어비앤비에서도 조식은 실망스러웠었다. 아침에도 아무거나 잘 먹는 나이지만 아침으로 비스킷을 먹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이 날의 빵은 이탈리아 여행을 통틀어 최고로 맛있는 아침 식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난 맛집 탐방도 안하고 빵집은 더더욱 안 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없었으면 절대 먹어보지 않았을 빵이었다. 우려했던대로 화가 누그러지고 말았다. 


첫 날은 밀라노에서처럼 일을 했는데, 역시 마땅한 카페를 찾기 힘들던 와중에 아놀드 커피라는 체인을 발견했다. 스타벅스가 없는 피렌체의 탐탐 격인 것 같아 정겨웠다. '토도모도'라는 서점과 카페 복합 공간도 좋았다. 최인아 책방이랑 비슷하면서 테이블이 좀 더 본격적으로 놓인 아늑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재미있는 컨셉의 동물 그림책도 한 권 샀다. 한국에서는 거의 항상 인터넷으로 책을 산다. 책 구경도 감각적인 큐레이션 서점보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 서점에서 한다. 선택권을 제한 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책을 직접 고를 수 있다는 안정감이 좋은데, 외국에서는 그런 자신감이 없으니 내가 좋아할 법한 책들을 잘 추려놨을 것 같은 감각적인 서점이 좋은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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