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 ④ - 친퀘테레와 피사

밀라노를 떠나 친퀘테레에 가는 날. 

 

관광을 했다기엔 딱히 본 게 없고 일을 열심히 했다기에도 애매했던 밀라노에서의 마지막 날이 왔다. 나에게 밀라노 최고의 명소였던 에어비앤비를 떠나는 게 제일 아쉬웠다. 호스트는 오늘 아침에도 우아하게 로브를 걸치고 커피를 마시며 드넓은 거실 한 켠 작업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짐만 놓고 시내 구경을 하다가 오후에 돌아와서 가져가겠다고 했더니, 자기는 병원에 다녀와야 하는데 떠나기 전에 다시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며 돌아올때쯤 전화를 해달라고 하셨다. 첫 날 내가 같은 일을 한다고 반가워했을 때 새침하셔서 질척거리지 않겠다 다짐했던 마음이 풀렸다. 결국 시간이 엇갈려 다시 만나진 못했지만 에어비앤비로 반가웠다는 메시지도 보내주셔서 밀라노 최고의 추억으로 남았다. 나도 숏커트 머리는 못해도 멋진 할머니가 될테다. 

마지막 밀라노 시내 구경은 어딜 가야할지 막막해 다시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광장에 접근하지 않고 근처 건물에 있는 테라스 카페에 안전하게 앉아서 아름다운 대성당을 여유롭게 구경했다. 기차 시간이 다가오는 것도 깜빡할 만큼. 헐레벌떡 카페를 뛰쳐나와 숙소에 들러 짐을 챙기고 중앙역으로 뛰어갔다. 마음이 급하니까 주변 난민이고 뭐고 뵈는 것도 없었다. 플랫폼 번호를 확인하고 딱 정시에 도착해서 기차에 올랐다. 이제 됐다. 입석 칸에 사람이 많아서 예약한 좌석에 못 가고 서있어야 했지만 기차를 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화면을 보니 목적지 이름이 낯설다. 경유지로 내가 가고 싶었던 코모 호수도 보인다. 친퀘테레는 남쪽이고 코모 호수는 북쪽인 줄 알았는데 왜지? 내가 가야 할 라스페치아 역 이름은 왜 안 보일까? 대신 루가노라고 써있는데 같은 L로 시작하니까 주변 지역인가? 이런 의식의 흐름 끝에 구글 지도를 켰다. 이상하게도 Lugano를 검색하니 옆에 Switzerland라는 단어가 딸려 나온다. 그제서야 스위스에 여행 간 친구가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던 하늘이 새파랗고 아름다웠던 사진들이 생각났다. 그래 그 사진들 제목이 루가노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계획에도 없던 다른 나라로 가는 기차에 무임승차로 몸을 실은 거다. 검표원에게 걸리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잘못 예약한 기차표를 보여주면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이 객실을 꽉 채운 이탈리아 청소년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읍소하겠지? 설명은 영어로 하더라도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이탈리아어로 더듬거리며 봐달라는 뜻을 구차하게 전하겠지? 그러다 결국 완강한 검표원에게 벌금을 물고 허탈하게 기차에서 쫓겨날 테고. 제발 이 꼴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며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기차가 멈추길 기다렸다. 

다행히도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며 알 수 없는 이탈리아 북부 어느 아담한 기차역에 내렸다. 플랫폼에서는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모르겠는 어린 현지 아이들이 스무 명은 있었다. 밀라노행 기차표를 샀지만 전광판에 나오는 플랫폼 번호는 자꾸 바뀌고, 관광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안내 방송은 이탈리아어로만 나오고, 내 이탈리아어 실력으로는 누구를 붙잡고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어 한 시간 가까이 플랫폼들 사이를 오가며 헤매야 했다. 말은 안 통하고, 아이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에 숨 쉬기는 힘들고, 거기다대고 한국에서처럼 손을 마구 휘저으며 싫은 티를 낼 수도 없어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나를 챙겨줄 사람은 나 하나뿐이니까, 정 울고 싶거든 무사히 라스페치아에 도착한 다음에 숙소에서 울자는 마음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고생 끝에 돌아온 밀라노는 고향처럼 포근했다. 처음보다 비싼 값에 기차표를 새로 사고,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플랫폼 번호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플랫폼에 들어갈 때부터 내 자리에 앉아 기차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 마주친 모든 역무원과 승무원, 주변 좌석 승객들에게 이 기차가 라스페치아 행이 맞는지 확인했다. 헛돈을 좀 쓰긴 했어도 무임승차한 기차를 타고 루가노에서 난데없이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비교하면 모든게 감사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언젠가부터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단단히 삐진 부정대마왕이 되어 있었다. 

차창 밖으로 해안가 풍경이 펼쳐지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한국적인 나무라고 생각했던 소나무가 꽤 자주 보여서 신기했다. 그러고보니 소나무에 바다와 절벽, 허름한 건물들이 어우러져 제법 한국과 비슷해 보였다. 나폴리도 대충 이런 풍경이겠지,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고 하는 건 통영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나폴리도 별거 없다는 뜻이었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부정대마왕으로서의 저력을 과시했다. 사실 사진으로 본 나폴리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나는 통영도 굉장히 좋아한다고 뒤늦게 변명해본다. 

다음 날 갔던 친퀘테레와 피사에 대한 나의 감상은 '그냥 그랬다'. 

"친퀘테레를 별 감 흥없이 보고 피사로 향했다. 피사도 사실 그냥 그랬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체 뭐 먹고 살까 싶은 느낌. 피사의 사탑은 생각보다 희고 깨끗하고 예뻤다. 그리고 기울어져 있었다." 

일기장에 정말 딱 이렇게만 써놨는데, 두 지역이 정말 나랑 안 맞는 곳이었는지 흐린 날씨와 내 심통의 합작품이었는지는 다시 가봐야 알 것 같다. 이탈리아는 참 아름다운 나라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나랑 궁합이 안 맞았는지 주기적으로 기분 상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에, 이때부터 귀국하는 순간까지 나는 늘 잔잔하게 또는 격렬하게 삐진 상태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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