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RAVEL LOG

이탈리아 여행 ① - 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새까만 활주로가 비에 젖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제 짐을 찾은 다음 버스를 타고 에어비앤비 숙소로 가기만 하면 됐다. 별로 비가 오는 게 걱정이긴 하지만 트렁크를 찾으면 우산을 꺼내고 두꺼운 옷도 껴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내 트렁크는 나오지도 않았다. 빨간색 바탕에 무지개색 띠까지 매놓은 가방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는데도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분실물 신고를 하고 공항을 나섰다. 비내리는 밤 한 손으로는 우산 들고 한 손으로는 트렁크를 끌며 초행길을 가기가 막막했는데 뭐 몸은 가뿐해서 좋았다. 


자정이 다돼서 메스트레에 있는 에어비앤비에 도착했다. 친절한 모녀 호스트의 환대를 받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방을 안내받고 다시 혼자가 됐다. 타일로 된 바닥에서는 한기가 올라왔고 라디에이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옷이고 세면도구고 전부 트렁크에 있다. 이불은 또 웬 천쪼가리인지, 추워서 아마 몸을 쭉 뻗고 누울 수가 없었다. 방에 있는 전등을 전부 켰지만 아무리 멋없어도 밝은 형광등을 좋아하는 나에게 은은하고 아늑한 백열등은 답답하기만 했다. 호스트에게 뭔가를 부탁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잠도 오지 않고 막막한 기분에, 모든 걸 잊고 일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켰다. 여행 온 첫날 밤부터 일을 한다니 너무 워커홀릭스럽지만 그 순간 나한테는 웅크리고 앉아 일을 하는 게 춥고 배고픈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였다. 기내식으로 받았다가 챙겨왔던 비스켓이랑 치즈를 허겁지겁 먹었다. 주머니에 넣으면서 스스로 궁상 맞다 생각했었는데 그 궁상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어느덧 새벽 3시경, 이제는 눈이 감기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저 차가운 침대에 누워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원래는 무조건 똑바로 누워서 잠을 자는데, 너무 추워서 있는 옷을 다 껴입고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로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고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놀러 온 게 아니라 혈혈단신으로 돈 벌러 온 기분이었다. 배경 음악으로 조용필의 '꿈'이 나와야할 것만 같았다. 


드디어 아침이 왔다. 타일 바닥에서는 여전히 한기가 올라오지만 햇살은 눈부셨다. 부엌에 가보니 주인 아주머니가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신을 보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커피를 끓여주셨다. 나는 아직 추운데, 아주머니는 맨다리에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으셨다. 천쪼가리 같은 홑이불을 주신 건 아무래도 신경을 안 쓰신 게 아니라 정말 안 춥다고 생각하셔서 그랬던 것 같다. 아침을 먹으면서는, 비행기에서 공부한 이탈리아어에서 헷갈렸던 부분을 여쭤봤다. 그런데 바닥 수준인 나한테 너무 높은 수준의 문법까지 가르쳐주셔서 나중에는 그냥 yeah, si, oh yeah? 따위의 대답을 번갈아 하면서 예쁘게 미소를 짓는데 주력했다. 나중에 예문을 말씀하시면서 따라해보라고 하셔서 다 이해한 척 따라하기까지 했다. 사실은 앵무새가 사람 말 따라하듯 따라한 거였지만 좋은 학생이 되고 싶었다. 


배를 채웠고, 밤에는 따뜻한 이불을 새로 받기로 했고, 트렁크도 도착했다. 비록 한 쪽 모서리가 박살나 있었지만 그저 갈아입을 옷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이제야 비로소 놀러온 기분이 나면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제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베네치아 본섬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베네치아 본섬에서는 리알토 다리 같은 곳으로 직행하는 대신 숙소 아주머니가 알려주신 산책로부터 찾아갔다. 좁은 길이 아니라 옆으로 바다가 있는 길이였는데 여행가이드 책에 나오는 명소는 없어도 북적임 없이 여유롭게 물을 보며 걷기 좋았다. 관광객으로서 다른 관광객을 싫어하는 건 참 모순적이면서도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이다. 한 구석에는 그림 동호회에서 나온 듯한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이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한가로운 산책을 끝내고 마르코 광장으로 전력질주했다. 어서 마르코 광장을 보고, 리알토 다리를 보고, 예약해둔 전망대도 올라가봐야 했다. 정신 없이 셀카 몇 장만 찍고 길 찾기에 집중하며, 그 어느 관광객보다도 바쁘게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내가 이렇게 서둘렀던 이유는 저녁에 예약해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액티비티가 있기 때문이었다. 미술관이니 성당이니 구석구석 둘러보고 싶었지만 한정된 시간에 제일 하고 싶은 건 이 액티비티였다. 그건 바로 곤돌라 노젓기! 이탈리아어로는 이 사공을 곤돌리에라고 부른다. 보통 줄무늬 옷을 입고 있길래 나도 일부러 줄무늬 옷을 챙겨가서 입고 갔다! 장소가 본섬 구석진 위치에 있어서 관광 명소 점찍기를 끝내자마자 경보 선수처럼 돌진해야 했다. 도착한 곳은 전통 곤돌라를 만드는 공방이었다. 총 7명 정도가 왔는데 나랑 호주에서 온 부부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곤돌리에 두 명과 같이 출발했다. 


나름 호수에서 노 젓는 배를 두 번이나 타봤고 스탠드업패들링도 해봤기 때문에 노 젓는 감각이 영 없지는 않았다. 패들링을 하면서 정말 기초적인 설명을 들은 것 말고는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감이라는 게 생겼었는데, 곤돌리에들의 설명 속에 내가 느꼈던 그 감이 정확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어서 좋았다. 

여기서 배운 건, 내가 아무리 힘이 세도 물을 이겨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물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칼로 베어내듯 물의 흐름에 맞춰 노의 각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좀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것 같다가도 집중력이 약해지면 어느새 노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럴 땐 얼른 정신을 차리고 노가 물에 순응하도록 각도를 조절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물에 떠밀리지 않고 계속 노를 저을 수 있는지를 아는 게 기본이기는 하지만, '실수하지 않는 방법'보다 '혹시라도 실수했을 때 되돌리는 방법'을 배웠을 때 훨씬 큰 자신감이 생기고 더 오래 버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 출발한 장소는 좁은 물길이었는데, 내가 잘해서 액티비티 게스트들을 데리고는 처음 나가보는 거라며(!) 그랜드캐널로 진출했다. 좁은 물길은 잔잔해서 노젓기가 더 쉽고 거리에 다니는 주민들이 곤돌리에 선생님이랑 다 아는 사이라 지나가며 인사하는 모습이 정겨워 보여서 좋은 대신, 옆에 정박된 다른 배나 벽 같은 장애물에 계속 신경써야 했다. 나는 벽을 발로 차는 걸 꼭 해보고 싶었으나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반면 그랜드캐널은 옆에 걸리적거리는 건 없지만 물살이 세고, 옆에서 모터보트가 지나가면 파도가 생겨서 더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노를 젓다가 앞을 보면 넓은 운하 앞으로는 하늘이 뻥 뚫려있고, 양옆으로는 근사한 중세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서 내가 정말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선생님한테 들은 흥미로운 사실은, 곤돌리에들이 노래를 하기 시작한 게 전통이 아니라 베네치아가 관광지로 지금만큼 발전하기 전에 관광객들을 태우고 가면서 가만 있기는 뻘쭘하고 무슨 말을 해야될지 모르겠어서 노래를 하기 시작한거라고! 난 사실 여행 준비하면서 악상이 떠올라 급히 한 소절짜리 멜로디를 만들고 노 저으면서 부르겠다며 회화 책을 뒤지고 번역기를 돌려서 무려 이탈리아어로 가사까지 썼지만 끝내 부르지 못했다. 사실 그 노래는 <시스터액트>에 나온 I will follow him을 표절한 걸로 판명됐다. 그러니까 내가 못 부른 건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창작자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거다. 


공방으로 돌아와서는 내부를 구경했다. 곤돌라는 언뜻 보면 장식적인 조각품처럼 보여서, 이탈리아니까 뭐든 아름답게 만든거겠거니 했는데 사실은 곡선 하나하나가 쓸모가 있는 요소였다. 그런 사실이 곤돌라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은 베네치아의 미래에 대해 걱정이 많으셨다. 정치인과의 유착 관계가 심하고, 부동산이 너무 올라서 집들은 비어가고, 전통을 잃어가고 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베네치아에서는 젊은이들에게 기회가 없어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자신도 곤돌리에가 되기 전에는 무라노에서 유리 공예를 했었는데 그 일이 정말 싫었다고 한다. 무라노에서 태어나면 다른 직업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고. 그런 얘기를 듣다보면 전통을 어디까지 어떻게 지키는 게 가치있는건지 의문이 든다. 분명 전통과 역사는 가치 있고 아름답지만 그걸 지키기 위해 누군가 인생에 족쇄를 차야 한다면. 그렇게 지켜진 전통이 정말 아름다운 건지. 

무라노에서 억지로 유리를 불었다는 이야기를 여행 시작부에 들어서 그런지, 베네치아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다른 지역에서도 종종 보였던 무라노 유리가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었더니 도톰한 깃털이불이 나를 맞아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