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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LOG

이탈리아 여행 ② - 밀라노

베네치아 다음으로 향한 도시는 밀라노. 


숙소는 중앙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대로변이라서 길치인 나도 구글 지도만 보고도 충분히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유독 상세하게 찾아오는 법을 알려줬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오른쪽으로 50m를 걸어가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밖으로 나오면 30m 직진하다가 공원을 왼쪽에 두고 맞은편 오른쪽 인도로 걸어와라' 이런 수준으로. 뻥 뚫린 중앙옆 앞에서 대각선으로 바로 보이는 건물까지 가는데 굳이 이런 설명이 필요할까 의아하면서도 지령을 받은 첩보원이 된 기분으로 설명을 따라 길을 걸었다. 설명 따라 가는데 신경쓰느라 주변을 많이 둘러보진 못했지만 언뜻 본 공원은 노숙자들이 점령한 상태라 아름답지 않았다. 같은 방향이지만 시키는대로 차도 건너편 오른쪽 인도로 가는게 마음이 편했다. 


밀라노에서 묵을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는 뉴욕에서 왔다는 아주머니였다. 밀라노나 로마에는 커트 머리에 패션쇼에서 걸어나온 듯 근사한 중노년 여자가 정말 많았는데 그런 사람의 집에 묵게되다니! 그 집에는 아주 순한 강아지도 두 마리 살고 있었다. 이름을 물어봤는데 처음 나온 얘 이름이 돌체라길래 내가 "그럼 쟤는 가바나?" 했는데 알고 보니 처음 애는 돌체가 아닌 둘체고 두 번째 애는 그냥 (프라다랑 상관없는) 미우였다. 간단하게 주의사항을 듣고 가볼 만한 곳을 추천 받은 다음 개인적인 얘기도 나눴는데, 알고보니 그는 나와 같은 프리랜서 번역가에 같은 패션 분야 일을 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나랑 같은 일을 하다니 뛸듯이 반가워하며 "나도 프리랜서 번역가야! 클라이언트 중에 누구누구도 있어!"라고 대답했는데 반응이 시큰둥해서 좀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나중에 대화를 좀 더 나누며 알게 된 결과 그의 대략적인 삶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완벽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채로 살다가, 우연히 조금은 거칠지만 그녀 주변의 세속적 인물들과 달리 참된 사랑을 할 줄 아는 소탈한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고 마는' 여자 주인공의 이력 같았다. 그러고보니 뭐 나같은 사람이 와서 본지 10분만에 "너랑 나랑 똑같네!"하고 반색하면 좀 외면하고 싶을 수도 있지 싶어 마음이 풀렸다. 


대화를 끝내고 밀라노 시내를 구경하러 길을 나섰다. 사실 로마 생각으로만 들떠서 밀라노에 대한 계획은 별로 세우지 않아 막막했다. 어차피 처음 오는 도시니까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대신 밀라노 대성당으로 향하면서 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걸 즐기기로 했다. 호스트의 지령을 따르는 대신 내 멋대로 길을 선택하자 아까는 못 봤던 난민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인종차별적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당장 나는 모르는 도시에 혼자 와있고, 저들은 한 무리에 건장한 남자가 열댓명씩 모여서 광장을 채우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으니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도에서만 본다면 탁 트인 광장과 공원이 펼쳐진 낭만적인 장소일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대낮부터 술마시는 노숙자 무리와 무리지어 사람들을 쳐다보는 난민 무리 사이를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은 결과, 호스트가 지령이라도 내리듯 상세하게 길을 알려준 건 게스트가 이런 상황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선글라스로 불안한 시선을 감추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대성당을 향했다. 중간에 길을 잃는 바람에 관광지보다 일상적인 밀라노의 거리를 걷다가, 지친 다리를 쉬기 위해 앉아서 식사도 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쇼핑거리를 통과해 마침내 그 하얗고 아름다운 대성당을 보게됐다. 하지만 그 감동도 잠시, 너른 광장은 난민과 비둘기와 관광객이 뒤섞인 혼돈의 도가니였다. 사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도 관광객과 비둘기의 집결지였는데 여긴 난민까지 가세해 있었다. 게다가 관광객 주변으로 모이를 뿌려서 비둘기가 몰려들게 만들고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나에겐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런 걸 원하는 관광객이 요청하는 건 줄 알았는데, 지켜보니 사진 찍는 사람에게 무작정 다가가 모이를 뿌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광장에는 비둘기가 떠날 줄을 모르고 눈높이에서 날아다니고 발에 채인다. 그래서 한 발짝 내딛기도 쉽지 않았다. 대성당은 지금껏 봐온 어떤 건물보다도 장엄하고 아름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이 장소에 있고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순 없다는 의무감만으로 셀카를 몇 장 찍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느라 입장 시간이 지나버렸지만 그냥 가기는 너무 아쉬워서, 건물 옆쪽으로 돌아가 최대한 가까이에서 외벽을 감상했다. 누가 올라가보지도 못할 구석구석이 (아마도 성경) 이야기가 담긴 조각들로 채워져 있었다. 정말 새가 되어 가까이 날아올라가 하나씩 감상하고 싶은 아름다움이었다. 내가 안에 못 들어갔던 건 다음에 사랑하는 사람이랑 다시 올거라서겠지. 


지하철을 타기 위해 다시 광장을 지나치던 중, 어떤 흑인이 실팔찌를 주고 싶다며 말을 걸어왔다. 이게 난민들의 굉장히 흔한 수법인 건 몰랐지만 공짜는 없다는 게 인생의 진리니까 거부하고 가려고 했더니 대신 어디서 왔냐, 난 어디에서 왔다 등의 대화를 시도하며 악수를 했다. 그러고는 우정의 표시로 이 팔찌를 주고싶다며 정말 공짜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는데, 그 상황이 되면 아닌 걸 알면서도 팔을 내밀 수밖에 없다. 막말로 뿌리치고 뛰어서 도망가더라도 그쪽에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붙잡을 수 있으니까. 결국 그 사람은 내 손목에 팔찌를 채우고는 본뜻을 밝혔다. 


난민: 그런데 너 돈 좀 있어?

나: No. 

난민: 동전이라도..? 

나: No. 


더 질척거리면 "You said it's free"라고 하려고 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딱 두 번의 No를 끝으로 깔끔하게 돈 받기를 포기했다. 나는 단호함이나 강단과는 거리가 먼 목소리인데 그렇게 빨리 포기하다니 나 자신도 얼떨떨했다. 대신 You're so pretty, I love you 따위의 가벼운 성희롱과 함께, 엉거주춤 뒷걸음질치는 나를 가리키며 다른 사람들에게 "She's my girlfriend!"라고 소리치는 걸 마지막으로 나를 보내줬다. 혹시라도 쫓아올까봐 무서우면서도 괜한 행동으로 기분을 자극할까봐 뛰지도 못하고 걷다가, 사람이 북적거리는 옷가게에 들어가서야 마음을 놨다. 


나중에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듣고 인터넷으로 찾아본 결과,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같은 수법으로 실팔찌 강매를 당한다고 한다. 혼자나 둘이서 다니는 여자가 주 표적이긴 하겠지만, 난 다음날 백인 어른 남자 두 명이 같이 있다가 당하는 것도 봤으니 누구도 안심할 순 없는 것 같다. 혹시라도 팔찌를 찬 상태에서 돈을 안 주고 가려고하면 주변에서 갑자기 다른 난민들이 몰려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신체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고 한다. 


물론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지만 이제 나는 난민한테서 실팔찌를 진짜 공짜로 받았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말인데 나만 무사통과할 수 있었던건 혹시, 그 난민이 마지막으로 외친 "She's my girlfriend!"가 사실은 "얘는 그냥 보내주자!"라는 자기들끼리의 암호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