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 ③ - 밀라노

밀라노에서의 둘째 날 일정은 카페 투어! 


원래 코모 호수에 가고 싶었던 날이지만 일은 해야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내 계획은 밀라노의 공공자전거 '바이크미'를 타고 카페 한 군데에 가서 일하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 때 쯤이면 또 자전거를 타고 다른 카페로 이동하면서 카페 4~5군데에는 가서 일도 하고 분위기도 즐기고 다양한 커피를 맛보는 거였다. 일단 카페는 인테리어, 분위기 보다도 '일하기 좋은 카페'를 찾아야 해서 선택지가 많진 않았다. 우리 동네에 있는 '일하기 좋은 카페'만 세어봐도 밀라노 전체에 있는 것보다 많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자전거 타고 바람을 쐬며 관광지를 벗어난 거리를 구경하고, 예쁜 카페에서 사진도 찍으면 디지털 노마드적이고 인스타그램적인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바이크미는 무려 2008년에 생긴 공공 자전거라고 한다. 서울에서 즐겨 타는 따릉이보다 한참 선배인거다. 그래서 그런건지 따릉이보다 전반적으로 낡고 차체가 무거웠지만 연륜 있는 자전거의 중후한 멋이라고 치고 길을 나섰다. 마침 베이지/주황색 배색 티셔츠를 입고 나왔는데 바이크미랑 깔맞춤한 것 같아 반가웠다. 패션의 도시에 왔으면 이정도는 센스는 발휘해야지 그럼. 지금까지 나에게 유럽에서 자전거 타기를 꿈꾸게 했던 건 베를린과 런던에서 본 자전거가 있는 풍경이었다. 두 도시에서 모두 아주 질서정연하게 자전거 도로를 달리는 훈훈한 광경을 봤었다. 특히 베를린은 규칙을 어기는 게 용납되지 않는 대신, 잘 지키기만 하면 모든 게 쾌적하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반면 밀라노는 좀 더 자유롭고 관대했다. 엉망이라는 걸 비꽈서 말하려는 게 아니라(엉망이긴 했다.. 사실 그 날 일기엔 무법천지라고 적어놨다), 내가 내 마음대로 다니는 만큼 다른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다니는 것도 인정하는 느낌이랄까. 베를린에서는 혹시라도 잘못된 길이나 방향으로 달리면 혼쭐이 날 것 같았는데(가 아니라 실수로 자전거 도로에 서있다가 혼쭐이 났었는데) 여기는 다들 제멋대로 다니고 나만 뭐라도 지켜보려는 쫄보인 것 같았다. 서울과 달리 경사도 거의 없어서 몸이 편했다. 지도 보느라 자꾸 멈춰야 했던 점만 불편했기 때문에 네비게이션을 달거나 시내 지리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정말 신나게 다닐 수 있겠다. 


자전거의 높이와 속도로 달리니까, 어제 걸었던 똑같은 길도 처음 가보는 길 같았다. 제법 넓은 사거리도 지나갔는데 저 멀리로 마치 두바이에서 볼 법한 생김새의 고층 건물도 보였다. 그런 미래적 풍경과 고풍스러운 옛날 건물과 멋쟁이 행인들을 번갈아 구경하면서 넓고 한산한 도로를 달리자니 밀라노에 며칠 더 머무르면서 자전거를 타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고 싶었다. 그렇게 첫 번째 목적지인 몰스킨 카페에 도착했다. 


나는 여럿이 같이 쓰는 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얼마 후 포르투갈 남자가 맞은 편에 앉아서 나처럼 노트북으로 일을 했다. 서로 무심하게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는데, 그 남자 옆에 프랑스 여자가 와서 앉았다. 여자가 뭔가 사소한 걸 물어보면서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했는데, 분위기가 점점 화기애애해졌다. 각각 포르투갈, 프랑스 사람인 것도 이 대화를 주워듣고 알게됐다. 둘은 각자의 직업과 밀라노에서 외국인으로서 혼자 사는 외로움에 대해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다. 그들이 영어를 써준 덕분에  나는 눈코입은 무심한 척 귀만 쫑긋 세우고 영어 듣기 평가라도 하듯 대화르 경청했다. 눈동자가 시선을 따라 티나게 움직이는 것과 달리 어느 쪽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하든 귀가 그쪽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참 고맙고도 무서운 거다. 그 와중에 도메인 네임 브로커라는 여자의 직업이 신기해서 구글 검색까지 해봤다. 나한테 들려준 것도 아닌 사적인 얘기를 많이 들은 건 미안하지만, 내가 제일 먼저 와있었는데 그렇게 가까이 와서 대화를 나눈 건 그쪽들인 걸 어쩌겠어요. 덕분에 재밌었어요. 하지만 이대로는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어서, 아쉽게도 이 커플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두 번째 카페에 가서 열심히 일을 할거라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계속 길을 잘못 들고, 등은 땀 범벅이 되고, 겨우 찾아간 카페에는 인터넷이 없는데다 변압기를 첫 카페에 놓고 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고, 첫 카페로 돌아와 변압기를 찾은 뒤엔(포르투갈 남자와 프랑스 여자는 가고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하늘이 슬슬 어두워지고 카페들은 문을 닫을 시간이 됐다. 결국 일도 거의 못하고 인스타그램적인 사진도 못 건진 채 배만 고파져서 숙소 동네로 돌아왔다. 


보이는대로 들어간 식당은 우리나라로 치면 허름한 동네 백반집일 것 같은 곳이었다. 인기 있는 곳은 아닌지 손님은 나뿐이고 뒤늦게 찾아본 구글 후기도 그냥 그랬다. 제육덮밥 시키는 기분으로 까르보나라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예전에 봉사활동 다녔던 안내견학교에서 쓰던 개밥그릇과 똑같은 스테인리스 그릇에 숭숭 썰어 담은 바게트를 식전빵으로 받았다. 개들이 정신없이 먹던 것처럼 나도 맛있게 먹으라는 깊은 뜻이겠지. 서울에서 커피숍에서 일을 하고 집에 가다가 출출하면 김밥천국이나 김가네 같은데에서 배를 채우고 들어가곤 하는데 개밥그릇에 든 빵과 텁텁한 까르보나라를 혼자 먹고 앉아있으니 딱 집에 가기 전 끼니 떼우는 기분이라 밀라노 시민이 된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리모네 젤라또를 하나 입에 물고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은 밀라노를 떠나 친퀘테레로 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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