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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S/시치미 제작기

[디자인] 시치미 가방 제작기 - 작업의뢰서 쓰기

이제 가죽을 확정했고, 작업 의뢰서를 만들 차례였다. 의뢰서라고도 부르고 지시서라고도 부르던데, 뜻이야 같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되도록이면 의뢰서라는 말을 쓰고 싶다. 디자인까지는 나만 알아보고 내 마음에만 들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내 디자인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니 쉽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작업 의뢰서들처럼 실무자의 향기를 내고 싶지만, 그러기엔 아는 게 너무 없다. 그러니 정성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제품 이미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안 그리고 내가 만든 가샘플 사진으로 대체했다. 바느질할 때 만들었던 패턴도 참고용으로 함께 보냈는데, 사실 이건 공장에서 실제로 쓰는 패턴이랑 못 쓴다고 했지만 상세 치수 표기하기에 좋았다. 무엇보다도 제작에 조금이라도 참고될까 싶은 정보는 몽땅 챙겨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늘 가방 만드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디자인일지 몰라도 내 입장에서는 여기 길이가 몇 cm이고 저기 간격이 몇 mm인 게 모두 머리를 싸맨 고민 끝에 나온 결과물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시치미 디자인'이라는 작은 세계에서만큼은 내가 최고 전문가인 거다. 

그렇게 쓴 작업의뢰서를 보내고 다음날 재료를 싸들고 공장을 방문했다. 그중 몸판에 쓸 가죽은 무거워서 가게에 맡겨두고 왔었는데, 무려 2주 만에 가죽을 찾으러 들렀더니 사장님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이거 찾으러 오신 거 맞죠?" 이러면서 맨 밑에 깔려있던 내 가죽을 꺼내 주셨다. 그 가게는 딱 두 번 들러보고 가죽도 겨우 1장밖에 안 샀는데. 사람 상대하는 직업 가진 분의 눈썰미란 이런 것인가 싶어서 신기했다. 나는 일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인지 얼굴 기억하는 능력이 점점 퇴화하는데 말이다. 

이제 진짜로 공장으로 향했다. 미리 보내둔 작업 의뢰서를 가지고 얘기하는데, 공장 사장님이 나보고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 처음 봤다고 하셨다. 보통 '기저귀 가방 만들고 싶어요' 그러면 자기들이 스케치부터 다 해주고 정식 브랜드에서도 스케치 정도만 해오지, 이렇게 직접 가샘플 만들어오는 사람은 없다고. 그런데 쓰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다. 인스타그램에서 옷 파는 사람들이 맨날 하는 말인데. 자기가 너무 완벽주의라서 공장에서 혀를 내두른다 뭐 이런 거. 다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던 걸까?

아무튼 열정보다 중요한 건 결과물이 잘 나오는 거다. 보통 샘플이 한 번에 통과되는 경우는 없고, 아무리 적어도 두세번은 수정을 봐야 한다고 한다. 일단 가샘플도 이래저래 많은 수정을 거쳐서 완성한 거라 지금 당장에는 바로 완벽한 가방이 나올 것만 같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만만한 법은 없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