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시치미 가방 제작기 - 가죽 사기

지난주 금요일, 드디어 공장에 가방 샘플 제작을 맡겼다. 원래는 생산 계약까지 해야 샘플도 의뢰할 수 있는데 나는 그냥 샘플만 내보는 거라, 공장에서 남는 시간에 제작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릴 예정이다. 

시치미에 들어가는 가죽은 세 가지 색이다. 지난번에 신설동을 헤집고 다니면서 두 가지 색은 결정했는데, 제일 중요한 주황색 가죽을 고르지 못했었다. 필요한 양은 1평도 안되는데 1평짜리 가죽은 비싸도 5천원이라서 일단 주황색이기만 하면 다 집어왔었다. 그런데 가게 조명 아래와 햇빛 아래, 결제하기 전에 볼 때와 결제 끝나고 볼 때(도대체 왜!), 시장 한복판에 서서 볼 때와 집에 와서 편하게 펼쳐놓고 볼 때 느낌이 다 다르다. 그리고 포인트 색상이라고 생각하니까 점점 자극적인 것만 눈에 들어와서 진한 다홍색을 잔뜩 사 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과하다. 어떤 가죽은 따로 보면 색감, 질감 다 좋은데 같이 살아야 할 바탕색을 칙칙하게 만들어버린다. 어떤 가죽은 가게에서 볼 땐 은은하게 윤기가 흐르는구나 싶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튀김 먹은 입술처럼 번질거린다. 

사실 신설동은 집에서 멀고 여정이 험난해서 자주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의 귀찮음과 피곤함보다는 가방의 완성도가 중요하기에 다시 한 번 가죽을 사러 나섰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무난한 주황색을 공략했다. 나름 세 번째 와본다고 동네 지리도 좀 보이고, 대량 판매만 하는 가게에 들어가서 퇴짜 맞지 않고 평당 판매하는 곳만 잘 골라 들어갔다. 사실 주황색 가죽 자체가 아주 흔하진 않고 소량 판매하는 가게에는 종류가 적어서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어쨌건 원하는 색감을 찾아서 누벅과 슈렁큰 두 가지 재질을 사 왔다. 

여담이지만 나는 패션에 관련된 번역을 근 10년 해왔기 때문에 용어는 웬만큼 아는 줄 알았는데 시장에 다녀보니 현장 용어는 달랐다. 번역할 땐 소비자에게 직접 말할 수 있는 단어로 최대한 고급스럽게 표현해야 해서, 영어나 유럽어 발음을 그대로 쓰거나 한국어로 번역하지 일본어식 용어는 절대 안 쓴다. 그런데 공장과 미팅을 해보니 내가 영어나 한국어 용어를 말해도 그쪽에서 편하게 쓰는 일본어식 용어로 바꿔 표현한다. 지금은 어차피 대놓고 초짜라서 모르면 바로 물어보지만 계속 효율적으로 소통하려면 그런 용어도 익혀야할 것 같다.

용어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게 시치미 디자인에는 아일렛이라는 부자재가 중요하게 들어가는데, 나는 아일렛이라는 표현을 너무 자주 써서 다른 용어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흔치 않은 사이즈의 아일렛을 찾느라 부자재 가게를 돌아다녀봐도 아일렛을 취급하는 곳 자체를 찾기 힘들어서 별도의 제작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공장이랑 미팅을 하는데 그들은 아일렛을 '하도메'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새 단어를 배우고 다시 신설동을 돌아다녀보니까 유리문에 '하도메'라고 대문짝만 하게 적어놓은 가게가 여기저기 있었다.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거였다. 물론 무분별한 일본어식 표현은 우리 사회에서 차차 없애가야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그런 운동을 펼칠 군번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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