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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계획된 불평등 / Programmed Inequality



제목: 계획된 불평등 | 여성 기술인의 배제가 불러온 20세기 영국 컴퓨터 산업의 몰락

원제: Programmed Inequality | How Britain Discarded Women Technologists and Lost Its Edge in Computing 

지은이: 마리 힉스

옮긴이: 권혜정 

출판사: 이김 | 2019년 3월 8일 



이 책 출간을 몇 주 앞두고 한 모임에 나갔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에게 근황을 전하면서 내가 번역한 책이 곧 나온다는 얘기를 꺼내긴 했지만, 내용이 워낙 진지하고 복잡하니 자세히 설명하기 뭣해 말을 줄였다. 그러고 다른 얘기를 한창 하다가, 혼자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시는 여성분이 사업 시작 전 다녔던 회사에서 겪은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분은 능력을 인정받아 팀장이 되었음에도 결혼 후 아이를 낳자 육아에 관련된 프로젝트밖에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회사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형 프로젝트가 생기면 부하 남직원을 클라이언트 앞에 내세웠는데, 결국 역량 부족인 그가 책임지지 못한 일에 대한 뒷수습은 자신의 몫이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아까 얼버무린 책 설명이 생각나서 말했다. “그거에요! 제 책도 그런 내용이에요!”


기술 발전 속도는 빠르기도 하다. 이제는 휴대폰으로 못 하는 일이 없는 걸 넘어 화면을 접었다 폈다 하기까지 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가 성숙해지는 속도는 느려도 너무 느리다. 요즘 나오는 계산기 수준의 컴퓨터가 집채만 한 덩치를 자랑하던 시절의 부당한 일들이, 손바닥만 한 휴대폰으로 못 하는 게 없는 현대 사회에서도 그대로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여섯 살 난 우리 조카는 소위 말하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답게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준 적 없는 스마트폰을 혼자 능숙하게도 만진다. 아마 컴퓨터가 집채만큼 큰 물건이었다는 건 상상도 못 할 거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 기술과 사회 발전 속도의 격차를 메꿔서, 그런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땐 이 책이 드러내는 우리 사회의 뼈아픈 단면도 '집채만 한 컴퓨터'만큼이나 낯설고 케케묵은 얘기가 되도록 만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