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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코드와 살아가기

제목: 코드와 살아가기
코드가 변화시킨 세계에 관한 여성 개발자의 우아하고 시니컬한 관찰기

원제: Life in Code
지은이: 엘런 울먼
옮긴이: 권혜정 
출판사: 책만 | 2020년 8월 14일 

 

라떼는 말이야, 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 때는 말이야라고 말문을 열어서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기 좋아하는 기성세대의 행태를 풍자하는 신조어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책에도 그런 라떼 향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1970년대에 대학에 다니고 1978년에 개발자로서 사회에 발을 내디딘 저자 엘런 울먼의 그때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려 지난 세기에 쓰인 글들에, 신기하게도 현재 우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춰집니다.

저자는 1998년에 글에서, 누군가가 인터넷 덕분에 타인과 부대끼지 않고 집에 앉아 필요한 모든 물품을 배송 받으면서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려면, 다른 누군가는 밖에서 물건을 포장하고 배송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꼬집었습니다. 그리고 전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닥뜨린 2020, 누군가 집안에 안전하게 재택 근무를 하며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모두 챙기는 동안, 배달 노동자들은 재난의 최전선에서 감염 위험에 노출된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1994년의 글에서는 앞으로 쌍방향이라는 이름의 주문형 서비스가 우리 생활을 지배할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전화기, 텔레비전, 컴퓨터를 통해 하루 어느 시간이건, 입도 뻥긋하지 않고 원하는 서비스를 받게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제 우리는 아무 때고 넷플릭스에 접속해 원하는 영화를 보고, 클릭 번으로 새벽에 야식을 배달시키거나 장을 보고, 심지어는 택시를 타거나 카페에 가서도 휴대폰으로 목적지를 입력하거나 원하는 음료를 주문할 있습니다. 같은 차에 타고 있는 기사나 코앞에 있는 종업원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저자의 말처럼 사람을 대신해 프로그램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코드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한 저자가 처음부터 컴퓨터를 전공하면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길을 꿈꿨던 것은 아닙니다. 책에도 나온 것처럼 저자는 1970년대 초에 코넬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라는 당시의 신문물을 접하면서 기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지나가다가 초소형 컴퓨터에 호기심을 느끼면서 프로그래밍을 처음 배웠습니다. 요즘은 대학에 컴퓨터공학과가 많지만, 시절에는 다른 학문을 전공하고 다른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이 독학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워서 택하는 직업이 개발자였습니다. 그래서 저자 본인은 물론 상사들도 출신 성분이 다양했다고 합니다. 그런 배경이 코드에 파묻힌 생활 속에서도 인간과 기술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어 단단한 중심 근육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저자는 컴퓨터 세계에 발을 들이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 실력을 인정받을 있는 운영체제 저층까지 내려가는데 성공했지만, 세계에는 여성인 저자가 겉돌 수밖에 없는 이른바 남자 아이 문화 존재했습니다. 기괴한 행동을 할수록 실력을 인정 받고, 인정을 많이 받는 위치에 갈수록 젊은 백인과 아시아인 남성만 남게 되는 세계에 염증을 느낀 저자는 결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에서 컨설팅으로 업종을 변경합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자는 실력 있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의 내부자적 시선, 사회에서 주류에서 벗어난 외부자적 시선을 두루 갖추고 입체적인 시각을 갖추기도 했습니다.

세계를 바꾸는 혁신이 시작되고 전세계 스타트업 꿈나무들이 집결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컨설턴트, 작가로 일하면서 40여년을 살아온 저자는 컴퓨터 화면이 아닌 동네 거리와 공원과 공장 건물에서 온갖 변화를 목격해왔습니다. 히피들의 천국이었던 샌프란시스코가 말쑥한 예비 CEO들의 놀이터로 바뀌고, 투박하지만 그늘이 시원했던 공원은 매끈해지고, 스카이라인은 점점 복잡해져 갑니다. 젊은이들은 좋아하는 일을 한다 고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도 공유오피스에서 공짜 맥주를 마시며 밤을 지새웁니다. 하지만 밤새 컴퓨터 화면에 코를 박고 일할수록, 문득 유리벽 너머 세상을 바라보더라도 자신과 근사한 인테리어의 사무실이 거울처럼 비칠 실제로 바깥에 있는 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결국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코드가 삶에서 아무리 부분을 차지하더라도 우리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고, 인간다움을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집과 인터넷 회선만 갖추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해결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끼리 함부로 접촉하는 것이 건강을 위협해 온라인에 의존하는 삶이 권장되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각자의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동시에 기술의 혜택에서 소외되는 이웃이 줄어들도록 스스로와 주변을 돌아봐야 합니다. 이런 고민을 위해 자리에 앉으면 뇌에 연료를 공급해줄 커피 잔이 먼저 생각나기 마련인데요, 책은 그런 순간에 마시기 좋은 라떼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라떼, 진하고 고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