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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맥주 요즘 스터디 카페에서 일하면서 무료로 제공되는 음료를 아주 열심히 마시고 있다. 누가 보면 저 사람은 일하러 왔니, 음료수 축내러 왔나 싶을 만큼 많이 마시는 게 목표인데, 인간의 물배에는 한계가 있어서 쉽지 않다. 여기와 오랜 악연이 있는 만큼 이렇게라도 뽕을 뽑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도 여기가 스터디 '카페'라는 이름에 걸맞게 음료 구비가 참 잘 돼있다. 몇 년 전 초반에 생긴 스터디 카페는 같은 가격에 카페테리아가 아주 부실했는데 이제 이 업계도 경쟁이 치열해져서 그런 것 같다. 여기 카페테리아에는 에스프레소, 핸드드립 커피 3종과 직접 커피 내리는 도구, 에이드 베이스, 홍차 티백, 립톤, 시럽이 항상 구비돼있다. 그래서 우유를 사다 놓고 사랑하는 라테를 기본으로 한 잔씩 마신 다음에 다양한.. 더보기
금단의 공간 우리 아파트 상가 독서실은 이 동네에서 근 20년째 내게 금지된 공간이었다. 나는 고3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능 공부를 하겠다고 집 앞 독서실에 등록한 지 이틀 만에 주인아주머니와 모종의 갈등이 생겼고, 아주머니는 다음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의 만행을 알렸다. 그리고는 자신은 괜찮지만 총무를 보는 대학생이 이렇게 싸가지없는 아이는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며, 자신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나를 독서실에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단다. 나는 엄마가 통화하는 소리를 방에서 있는 힘껏 훔쳐 들으며 떨고 있었다. 다행히도 엄마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다니고 싶으면 사과를 하든지 아니면 엄마가 대신 짐을 챙겨 오겠다고 했다. 사실 나도 화가 날 만한 이유가 있었고, 독서실에 간다고 딱히 공부가 .. 더보기
[디자인] 시치미 가방 제작기 - 샘플 완성 공장에 의뢰한 샘플이 완성됐다. 비가 추적추적 오던 날, 샘플을 받으러 신설동으로 향했다. 받아본 소감. 우리 시치미 용 됐다. 뭐랄까, 다이어트, 치아교정, 피부 마사지 등등 할 수 있는 건 성형 빼고 다 해서 외모 업그레이드한 사람 같다. 디자인은 가샘플이랑 똑같아도 비싼 가죽 쓰니까 피부가 화장한 것처럼 해사하고, 울퉁불퉁하던 바느질이 단단하고 가지런해지니까 얼굴형이 매끈해졌다. 스트랩이랑 입구 지퍼도 달았더니 진짜 어엿한 가방이 됐다. 디자인은 이미 완성형인 줄 알았는데, 샘플 나온 걸 보니까 시치미의 새로운 표정과 가능성이 눈에 들어온다. 시치미는 눈이랑 입이 있어서인지 가방 같지 않고 새 친구 같다. 요즘 내 단짝 친구. 하루는 시치미를 들고 강남역에 크라우드 펀딩 설명회를 들으러 갔었다. 그.. 더보기
[디자인] 시치미 가방 제작기 - 작업의뢰서 쓰기 이제 가죽을 확정했고, 작업 의뢰서를 만들 차례였다. 의뢰서라고도 부르고 지시서라고도 부르던데, 뜻이야 같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되도록이면 의뢰서라는 말을 쓰고 싶다. 디자인까지는 나만 알아보고 내 마음에만 들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내 디자인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니 쉽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작업 의뢰서들처럼 실무자의 향기를 내고 싶지만, 그러기엔 아는 게 너무 없다. 그러니 정성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제품 이미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안 그리고 내가 만든 가샘플 사진으로 대체했다. 바느질할 때 만들었던 패턴도 참고용으로 함께 보냈는데, 사실 이건 공장에서 실제로 쓰는 패턴이랑 못 쓴다고 했지만 상세 치수 표기하기에 좋았다. 무엇보다도 제작에 조금이라도 참고.. 더보기
[디자인] 시치미 가방 제작기 - 가죽 사기 지난주 금요일, 드디어 공장에 가방 샘플 제작을 맡겼다. 원래는 생산 계약까지 해야 샘플도 의뢰할 수 있는데 나는 그냥 샘플만 내보는 거라, 공장에서 남는 시간에 제작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릴 예정이다. 시치미에 들어가는 가죽은 세 가지 색이다. 지난번에 신설동을 헤집고 다니면서 두 가지 색은 결정했는데, 제일 중요한 주황색 가죽을 고르지 못했었다. 필요한 양은 1평도 안되는데 1평짜리 가죽은 비싸도 5천원이라서 일단 주황색이기만 하면 다 집어왔었다. 그런데 가게 조명 아래와 햇빛 아래, 결제하기 전에 볼 때와 결제 끝나고 볼 때(도대체 왜!), 시장 한복판에 서서 볼 때와 집에 와서 편하게 펼쳐놓고 볼 때 느낌이 다 다르다. 그리고 포인트 색상이라고 생각하니까 점점 자극적인 것만 눈에 들.. 더보기
[노래] 아파트 반짝거리는 유리벽 매끈한 대리석 화려하게 우뚝 솟은 그런 집은 아니지만 할머니 눈가에 예쁜 주름처럼 세월이 잔뜩 묻어있는 내 나이보다 오래 서 있어온 정다운 우리 아파트 곱게 바랜 시멘트벽 녹슨 울타리 그 오랜 시간 모두 담고 아름답게 낡아있구나 더보기
포스트 아파트 나에게 아파트는 집의 다른 말이다. 굳이 따져보면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4~5년 정도 빌라에 살아보기도 했지만 내 기억 속에서 비중이 크지 않다. 그래서 책자 속 배우들 인터뷰에 나와있는, '아파트'에 대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에 대한 질문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흡사 삶에 대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뭐냐는 질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파트는 '아빠'를 뜻하기도 한다. 이건 제작진의 의도는 전혀 아니었지만 오늘 공연 중 나오는 영상을 보고 깨달은 거다. 왜냐하면 우리 아빠가 아파트 만드는 일을 오래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인 이유로 아파트는 아빠를, 이마를 부딪히면 말도 못 하게 아픈 제도판 모서리를,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과 명절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실 나도 아파.. 더보기
토이스토리 4 - 쓰레기는 쓰레기 통으로 포키는 쓰레기가 되고 싶었고, 이미 쓰레기였다. 꿈이라고 부르기는 뭣해도 포키가 '해방'을 외치면서 몸을 던져 돌아가려 했던 곳은 쓰레기통이었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아이의 장난감이 되어야 한다는 강요 아래 그 탈출 시도는 번번이 물거품이 된다. 포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우디의 못다이룬 꿈에 대한 미련이었다. 아이의 친구가 되는 것은 장난감으로 태어난 우디의 꿈이고 기쁨이었다. 그런 그가 앤디 옆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장난감으로서의 매력을 잃은 뒤 다른 존재에게 그 꿈을 대리 실현해줄 것을 강요하는 모습까지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포키는 태생부터가 일회용 식기였다. 인간 아이들을 기쁘게 해줘야 할 어떤 책임도 의무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하물며 장난감으로 태어난 보핍도 새로운 삶.. 더보기
안녕 드림위즈 드림위즈 메일이 서비스를 종료한다고 한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버티다 이제야 종료하는 게 더 신기하다. 드림위즈는 나의 첫 메일이었다. 1999년에 서비스를 개시했다고 하는데, 나는 2000년부터 확실히 드림위즈를 쓰기 시작해서 무려 2014년 말까지 업무용으로 활발하게 이용했었다. 그때 지메일로 넘어간 것도 내가 원했던 게 아니라 갑자기 접속이 안돼서 계속 버티다간 일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 아쉬움을 무릅쓰고 갈아탄 거였다. 이만하면 원년 멤버에 충성 사용자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나? 오랜만에 접속해본 메일함 최근 페이지에는 각종 광고 메일이 쌓여있지만 페이지를 한참 넘기면 각종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썸남들과 주고받았던 이메일은 오글거리지만 귀엽다. 첫 해외여행 예약 확인 이메일이 있.. 더보기
6월 이야기 재미있는 일이 많았던 6월이 벌써 끝나간다. 올해 5, 6월은 몸뚱이에게는 집에 누워 앓기만 하는 힘들고 지겨운 시간이었는데, 그와 반대로 머리와 손가락에게는 온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처음 접하는 분야의 일이 두 가지나 들어왔고, 새 책 번역도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겨울에 구상했던 가방 디자인 제작에 돌입했다. 이름하야 '시치미 백'! 우선은 그동안 번역하면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일러스트레이터로 스케치를 해본 다음 종이로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합성피혁 원단을 주문해다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내 손바느질로 샘플을 만들어봤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 것처럼 나도 패션 회사랑 9년째 일하니까 가방을 만드나 보다. 이제는 전문가의 손을 빌려 제대로 된 샘플을 만들어보려.. 더보기